연극 '대학살의 신' 리뷰

 

[문화뉴스 MHN 장기영 기자] 애들 싸움이 어른들의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아주 막장스러우면서도, 주변 어디서든 보기 쉬운 아주 흔한 일이다. 흔하디흔한, 그리고 비속하고 천박한 이 싸움의 전개과정을 연극 '대학살의 신'은 얼마나 진부하지 않게 풀어낼 수 있을까.

11살 두 소년 브뤼노와 페르디낭의 싸움이 일어났다. 페르디낭에게 맞은 브뤼노는 치아 2개가 부러지고, 이들의 부모는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의논하고자 모였다. 연극은 브뤼노의 부모 미셸(송일국)과 베로니끄(이지하), 페르디낭의 부모 알렝(남경주)과 아네뜨(최정원)가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미셸과 베로니끄의 집 거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들의 '의논을 가장한 싸움'은 90분간 리얼타임으로 관객들에게 생중계된다.

'이성적이고 우아한' 어른들은 처음에는 아주 상식적이고 고상한 언어와 주제로 대화를 전개한다. 폭력 사건이 일어난 가운데, 가해자로 지목된 페르디낭이 당연히 잘못됐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극이 중반을 거쳐 후반으로 갈수록 어른들은 이성적이지 않다. 이들은 지극히 사소하고 경박한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일에만 몰두하며 가정은 내팽개친 '알렝', 그는 아이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에 싸움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가정적이고 심약한 심성의 '아네뜨'는 아이들 간의 싸움이 일어난 원인을 보자며, 브뤼노를 '비겁한 사람'이라 지적한다. 인류의 문명을 굳게 믿으며 논리적인 것에 집착하는 '베로니끄'는 끝까지 페르디낭을 용서하지 못한다. 무던한 성격을 가진 '미쉘'은 이 일들이 좋게 끝나길 바라지만, 결국 '남자 아이들 간의 싸움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번 경우의 일은 당연하지 않다'는 자기모순적인 말을 내놓는다.

 

 

이들의 말싸움은 무차별적이다. 네 어른들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얼마간의 동맹을 맺었다고 방심할 수 없다. 이 난장판의 싸움에서의 진영은 '나'와 '내가 아닌 존재'로 나뉠 뿐이다. 아이들의 싸움을 주제로 시작된 대화는, 부부 관계에 대한 불만, 문명과 야만을 인식하는 각자의 가치관 차이, 딸의 애완동물을 내다 버린 행동에 대한 힐난 등 일상적인 것들로까지 주제가 옮겨간다. 

교양을 중시하는 중산층 학부모들이었건만 이들의 대화는 점차 천박해진다. 재밌는 것은, 이 싸움의 전개방식이 산만하고 부산하게 일어나는 듯하지만, 짜임새 있고 공감이 가는 주제로 발전된다는 것이다.

연극은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인간의 본성을 과연 '교양', '이성', '고상한' 그 무엇들에 두는 게 가당하냐는 것이다. 아네뜨와 베로니끄는 아주 우아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서로에게 듣기 좋은 말을 나열하다가, 이후에는 괴성과 구토, 욕설을 지껄인다. 알렝과 미쉘은 점잖고 호방한 언어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갈수록 비난과 인신공격, 술주정을 주된 언행으로 삼는다.

 

 

진부한 소재와 제한적인 시공간이라는 이 불안한 요소들은, 네 배우가 가진 각각의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 수준의 것인지 여실히 드러나게 하는 장치들이 됐다. 최정원은 '남경주 배우와 온전한 부부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고백하지만, 남경주와 최정원의 부부 역할로서의 호흡은 단단했다. 

또한 송일국은 그 동안의 역할들과는 달리 투박하고 아둔한 캐릭터를 맡아 극 초반에는 다소 어색한 공기를 내뱉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미쉘의 투박한 성격을 아주 능글맞게 그려냈다. 한편, 압도적 존재감을 발했던 배우는 단연 이지하다. 배우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공연 환경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논리 정연하던 베로니끄가 야만적인 성격을 드러내기까지, 연극이 사실적인 인간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준 배우였다.

연극 '대학살의 신'은 2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key000@mhns.co.kr 사진ⓒ문화뉴스 MHN 이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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