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서정준 기자]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뮤지컬 '시라노'는 한국 최고의 뮤지컬 배우 중 하나인 류정한의 첫 프로듀서 데뷔작으로 유명세를 탄 작품이다.

지난 7일 개막해 10월 8일까지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될 이 작품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원작으로 한다.

에드몽 로스탕이 쓴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품 중 하나였으며 프랑스의 국민문학이자 '삼총사'의 주인공 달타냥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에르퀼 사비니엥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실존했던 인물로 실제 전쟁에 참전한 용맹한 전사이자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았다고 하는 '달나라 여행기', '해나라 여행기' 등을 쓴 문무를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배경이 아니라 무대 위에 살아 숨쉬는 인물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뮤지컬 '시라노'는 그중 타이틀롤을 맡은 매력적인 인물 '시라노'를 이야기의 전면에 드러낸다.

시라노는 낭만이란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고 불의를 참지 않으며 우정과 의리를 중시한다. 또 권력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싸움도 잘한다. 약간의 지나친 자존심과 허세가 보이지만, 그조차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주변 인물들도 늘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거나 함께하려 할 정도다.

그런 시라노에게 코가 그의 유일한 약점이란 점은 흥미로운 설정이다. 대부분 주인공은 멋지게 잘생겼거나, 조금 나쁘게 잘생겼거나, 그냥 잘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설정이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도 그의 큰 코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어야 가능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시라노는 가히 불세출의 천재 시인이자 검객이며 인간미 넘치는 낭만가로 그려진다. 심지어 뮤지컬이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도 잘한다. 그가 읊는 아름다운 말을 듣고 있으면 누구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든다.

다만 그는 여자 앞에서, 정확히는 록산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다. 이건 잘생긴 얼굴만으로도 록산의 마음을 얻은 크리스티앙도, 오만방자한 권력자인 드 기슈 백작마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적인 아쉬움이 생겨난다. 극 중에서 각각 마음, 외모, 힘이 가장 뛰어난 세 남자가 반해야 하는 록산의 캐릭터가 효과적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의 제목만큼이나 이 극은 '시라노의, 시라노를 위한, 시라노에 의한' 극이기 때문이다.

인터미션을 포함해 2시간 50분 가량의 공연 시간 중 관객이 시라노가 아닌 다른 이에게 집중하게 되는 시간은 거의 없다. 각 주요 배역의 솔로 넘버 혹은 앙상블의 넘버 약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무대 위에선 시라노가 노래하고, 시라노가 움직이고, 시라노가 극을 이끈다. 주연 배우의 트리플 캐스팅이 무척 필요해 보일 정도다. 쉽게 만나기 힘든 세 배우의 팬들에겐 꿈 같은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로 인해 록산의 자유분방함과 솔직함으로 무장한 아름다움, 크리스티앙이 성장하며 깨닫는 서툴지만 깊은 진심도 드 기슈 백작의 록산을 향한 사랑도 시라노 앞에선 빛을 잃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시라노이긴 하지만, 시라노가 남들보다 더 천재적이고 낭만적인 인물로 그려지기 위해선 그를 받쳐주는 다른 이들의 밑그림이 조금 더 그려져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비극다운 극의 완급조절은 일품이다. 공연장에 앉은 관객들은 '긴 1막'의 상징 같은 90분의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경험을 할 수 있다. 대필 장면에서 드러나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콤비 플레이도 인상적이다. 다만 2막이 상대적으로 짧아지며 시라노의 사랑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서정성을 느끼기 어려운 점은 약간 아쉽다. 무언가 잘 차려진 음식에서 마지막 뒷맛이 조금 아쉬운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뮤지컬 '시라노'는 전체적으로 안정된 프로덕션 퀄리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프로듀서 류정한'의 첫 번째 작품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른 시라노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선 확실히 관객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아는 노련함이 느껴진다.

비주얼의 전체적인 톤도 낭만에 어울린다. 통상적으로 중세 유럽 배경의 뮤지컬에서와 달리 조금은 힘을 뺀듯하며 세련되게 만들어진 소설 삽화 풍의 무대 세트와 강한 발색의 조명, 인물의 등뒤에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달, 가을 단풍과 별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2막 무대 등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넘어가는 현실 속 시간만큼이나 작품과 잘 어울린다.

'시라노'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21세기가 왔다. 달나라엔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게 밝혀졌는데도 여전히 그가 싸워온 위선과 비겁함, 권력의 부당함이 살아남은 요즘, 미련할 정도로 순수한 사랑을 바치고 멋진 삶을 살다 간 시라노 같은 낭만가를 만나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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