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혁(오른쪽), 장석조(왼쪽)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화뉴스 MHN 양미르·석재현 기자] 실로 오랜만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2년에 혜성같이 등장해서 유튜브가 없던 그 시절에 무려 50만 명을 넘어서는 추종자를 양산해내며 온라인에서 애니메이션을 주도했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덧 5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들은 언제부턴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2017년 봄, 대중들에게 잊혀갔던 두 남자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대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마음 한구석에서 항상 꿈꿔왔던 영화관 상영을 이루어냈다. 인터넷 문화의 '대세'로 자리매김한 크리에이터의 원조이자, 국내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이며, 10여 년 만에 '만담강호'로 스크린 상영을 하게 된 '오인용' 정지혁-장석조 감독을 만나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들어봤다. 먼저, 영상으로 두 감독의 인사말을 살펴본다.
 

 

'오인용'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ㄴ 정지혁 : 때는 2002년이었고, 플래시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당시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였던 '홍스구락부'와 '졸라맨' 등이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을 듣고 뛰어들게 되었다. 플래시 애니메이션에 뛰어든 회사는 전문가들을 수소문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학 동기들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때마침 나뿐만 아니라 동기들 또한 졸업 작품을 만들면서 생겼던 아쉬움이 있었다. 뛰어들면서 1년 동안 3천만 원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막상 뛰어들어보니 잘 번다는 소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 또한 도중에 망해버렸다.
 
우리는 '빨리 인지도를 올려야겠다'는 급한 마음이 생겨 5명이 매주 1편씩 재밌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토요일마다 업데이트하기로 했다. 그러면 사람이 들어와서 광고가 들어오고 돈을 번 다음에 접은 후 예술성 있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주객전도가 되어버렸다. 생계형으로 시작한 애니메이션이 갑자기 인기를 끌게 되었고, "다음 편 언제 나와요?" 등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계속 달리게 생겼다.
 
비록 생계형으로 시작했지만, 많은 걸 느꼈다. 그동안 소통하는 방법이 단편 애니메이션을 상영해서 인정받는 것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웹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실시간 댓글이 2천 개 가량 달리는 게 매우 신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런 일이 잘 없었다. 우리는 이것이 소통으로 다가왔고, '단편 애니메이션이 아닌 이걸 해야겠다'고 생각이 바뀌면서 '오인용'을 만들게 되었다.
 
 
   
 
 
'오인용' 활동하면서 애니메이션 만들었던 방식은 어떠했는가?
ㄴ 정지혁 : 전부 1인 감독 체제였다. 다만, 각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더빙이나 스토리가 막히는 게 있으면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장석조 감독이 만든 '연예인 지옥'이나 내가 '중년탐정 김정일'을 만들 때, 만드는 건 당사자들이 직접 주도하되 서로 도와주고 더빙했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모르니 5명 각자 여러 가지 만들어서 올려놓았다. 
 
장석조 : '오인용'은 하나의 팀이라기보단, '플랫폼'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다. 팀이라고 하면, 팀원들끼리 협력하여 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우리는 다섯 명의 감독이 각자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서 '오인용'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시스템이었다. 작품을 만들 때 정지혁 감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로 배우거나 영향받을 점 등을 교류하며 동반 성장했다. 라이벌보단, 동업자 형태에 가깝다.
 
정지혁 : 과거 인터뷰할 때, '오인용' 체제를 '자유로운 공산주의'라고 소개했던 적이 있다. 작품활동은 자유롭게 하되, 나오는 수익은 무조건 1/n이었다. 누가 잘되든 상관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라이벌이라는 생각을 안 했다. 같은 배를 탄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기작들이 정해지다 보니 아무래도 서로 신경 쓰였던 면은 있었을 것이다. 
 
장석조 : '오인용' 내에선 정지혁 감독의 작품이 가장 인기 많았다. 그에 반해 다른 친구들이 만든 작품들의 조회 수는 절반에 못 미쳤다. 그 친구들의 작품도 아주 훌륭하고 좋은데 묻혀버리는 경향이 있어 아쉬웠다.
 
   
▲ '연예인지옥'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그러면 '오인용'의 히트작에 관련해서 물어보겠다. 먼저, '연예인 지옥'을 보면, '오인용' 인물들의 각 성향이 확연히 드러난다. 실제 '오인용' 멤버들의 성격과 비슷한 건가? 그리고 실화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는지 궁금하다.
ㄴ 장석조 : 예를 들어 극 중 등장하는 '정지혁 병장'은 군대에서 겪었던 악질 고참 모델로 삼고 있었다. 어느 날 옆에 있던 정지혁 감독을 보고 어울리겠다 싶어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찌질하면서 아부만 잘하는 고참 캐릭터를 구성하던 와중 친구인 김창후가 눈에 띄어 등장시켰다. 한마디로 군대 고참들을 모티브 삼아 실제 친구들로 옷을 입히니 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물론 실제 성향은 다르다. 정지혁 감독은 '정지혁 병장'처럼 과격하진 않고, 연기를 실감 나게 했을 뿐이다. 김창후 또한 사람들이 찌질한 줄 알지만, 실제 성격은 리더십도 있고 좋은 친구다. 그는 '김창후 이병' 캐릭터 때문에 손해 보는 면이 많았다. 그런데 재밌는 건, 각자 배역을 맡아 캐릭터와 실제 성향이 적절하게 섞이니 캐릭터를 닮아가는 게 보였다. 정지혁 감독은 점점 상남자다워졌고, 김창후는 좀 더 부드러워졌다. 
 
정지혁 : 예전에 미팅이나 길거리를 다니다가 만나는 사람 중 가끔씩 "너 왜 말하면서 욕 안 하냐?"고 물어보시기도 했다. 그럴 때, '정지혁 병장'처럼 욕을 할까 생각도 해봤다.
 
   
▲ '중년탐정 김정일'
그렇다면 '중년탐정 김정일'은 어떤 걸 참고로 만들어진 것인가? 
└ 장석조 : '중년탐정 김정일'은 정지혁 감독의 아버지를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었다.
 
정지혁 : 아버지가 욕쟁이다. 내가 아버지에 욕먹고 억울했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캐릭터로 승화했다.
 
한 번 우기면 이길 수 없는 '꼰대' 캐릭터를 만들 당시, 아버지에게 욕먹었던 기억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도 아버지가 말로 우겨버리시는 경향이 있어 이길 수가 없다.
 
아버지가 '중년탐정 김정일'을 보셨나?
└ 정지혁 : 아버지가 보수적이고 딱딱하신 분이라 실제로 보지 않으셨지만, 대신 저작권 달라고 하셨다(웃음). 반면에 어머니는 실제로 많이 챙겨보셨고 재밌다고 말해주셨다.
 
장석조 : '중년탐정 김정일'을 만들 당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면, 정지혁 감독은 자신이 '김정일'과 안 닮았다고 말했는데 옆에서 그의 어머니가 '너 닮았다'고 인증하셨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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