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고래 대표, 연극 '빨간시' 이해성 작·연출 '연극인 텐트' 內 인터뷰

   
 

[문화뉴스] 인터뷰를 하던 도중 "와! 만세!"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9일 오후,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순간이었다. 함성이 나온 곳은 '200만 촛불'이 지나간 광화문 광장과 그 안에 있는 '광화문 텐트촌'이었다.

 
'광화문 텐트촌'은 지난달 4일 문화예술인 시국선언 이후, '세월호 사건' 천막 뒤편과 이순신 동상 앞 주변에서 만들어졌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해 자발적으로 개인 텐트촌을 만들어간다"는 취지로 텐트 퍼포먼스는 시작됐고, 당시 텐트를 빼앗으려는 경찰과 문화예술인들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렀다. '광화문 텐트촌'은 문화예술인뿐 아니라 현 정권을 비판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으로 발전했고, '연극인 텐트' 역시 지난달 중순부터 '광화문 텐트촌'에 입주하게 됐다.
 
"무대에 있어야 할 연극인들이 광장에 모였다"는 의미심장한 표현이 떠올리는 가운데, 그 '연극인 텐트'를 지키고 있는 '방장'을 만났다. 현재 '2대 방장'으로 활동 중이고, 지난달 4일 텐트 설치 퍼포먼스 현장을 지켜본 극단 고래의 대표인 이해성 작·연출이다. 그는 2015년 5월 1일 594명의 문화예술인이 발표한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참여해 일명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려졌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한국일보의 보도로 공개된 날, 이해성 연출은 "우리 연극인 내에서는 '블랙리스트'를 공공연히 알고 있었고, 이제 물증이 나온 상태다. 그러든지 말든지, 연극만 잘 올리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그는 16일까지 나루아트센터 소공연장, 21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빨간시'를 연출하고 있다.
 
   
▲ 연극 '빨간시'의 한 장면.
 
2011년 초연됐고, 2013년, 2014년 재연되어 올해로 네 번째 공연의 막을 올린 '빨간시'는 2014년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희곡상, 작품상, 여자연기상(강애심)을 받았다. 유력 일간지 기자인 '동주'가 성상납으로 자살한 여배우 사건 이후 괴로워하다 저승사자의 실수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할머니 대신 저승에 가게 되면서, 여배우와 할머니의 삶을 보며 아픔의 기억이 자신과 절대 무관하지 않음을 느낀다는 내용을 담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한 시간 앞둔 9일 오후, 이해성 연출을 '연극인 텐트' 안에서 만났다. '빨간시'를 쓰게 된 배경과 비하인드 스토리, 10월 공연한 '고래햄릿' 이야기, 5년 가까이 극단 고래를 이끌어온 소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두 달 가까이 수면 위에 오른 상황에서 남기는 한마디 등을 들어봤다. 그리고 인터뷰 막바지 들려온 '탄핵안 가결' 소식에 대한 소감 역시 들어봤다. 먼저, 이해성 연출의 인사말을 들어본다.
 

 
지난 수요일(7일), 1,26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정식명칭)에 '빨간시' 장면을 시연했다고 들었다.
ㄴ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극단 식구들이 매주 집회에 참여했다. 매주 희망하는 시민 단체가 수요집회를 주관한다. 여태까지 4~5번 주관했는데, 이번에 사회를 맡아 퍼포먼스도 하고 성명서를 낭독했다.
 
2006년부터 수요집회에 참석했다고 들었다. 처음 집회를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ㄴ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되게 추웠다. 요즘처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 합쳐봐야 20명 정도 오셨고, 할머니도 4~5분 정도 계셔서 마음이 짠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찬 바람을 막아주고, 온기를 줬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바람이 휭 불고 나니 춥고 했다. 그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련한 작품을 집필하면서, 동시에 '장자연 사건'을 넣게 됐다.
ㄴ 초고를 쓸 때만 하더라도, '장자연 사건'은 포함되지 않았다. 2009년 3월, 초고를 쓴 후 수정작업을 하는 와중에 사건이 터졌다. '장자연 사건'이 나오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에 의한 폭력이었지만,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 여성이 성폭력에 내몰리고 있다고 봤다. 여전히 인류가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오인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정확히 해결하지 못하니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 이해하고 수용하게 됐다.
 
이번이 네 번째 공연인데, 그전까지 어떤 환경에서 공연을 올리게 됐나?
ㄴ 2011년 극단 고래의 창단공연으로 펼친 초연 당시엔 제작비 전액을 사비로 만들게 됐다. 그래도 2013년에 할 때는 창작 활성화 사후 지원금을 초연 당시 신청해, 3천만원을 받게 되어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했었다. 2014년엔 지원금 전혀 없이 선돌극장과 뮤디스홀에서 진행했다. 이번이 네 번째 공연이다.
 
   
▲ 이해성 연출(오른쪽)이 2014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희곡상을 받고 있다. ⓒ 문화뉴스 DB
 
2014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수상 소감을 가져와 봤다. "많은 분이 개런티 없이 작품을 순수하게 도와줬고, 관객들과 잘 만났다. 연극은 어떠한 보상을 떠나 어떤 가치가 있을 때, 그 가치만 바라보고 스스로 재능을 서로 나누고 합치고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정말 아름다운 작업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당시 상을 받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가?
ㄴ 사실 좀 놀랐다. 초연도 아니고, 3년이 지나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기쁘기도 했다. 이 작품을 다시 하면 힘을 받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공연을 2년이 지나서야 올리게 됐다. 이번에 공연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프레스콜 당시 질문 中)
ㄴ 2014년 세 번째 공연 당시 다 끝날 줄 알았다.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약칭)도 20년 넘게 열심히 활동하셨고, 이 문제를 UN에서도 다루는 등 일본의 압박을 많이 가했다. '빨간시'를 다시 하기엔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생명이 끝이 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엉터리로 이뤄졌다. 할머님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 진정한 사과도 없고, 10억 엔에 우리 역사를 팔아먹은 졸속 합의였다. 국제적으로 해결된 거 아니냐는 시각으로 쳐다보지만, 할머님은 전혀 치유하지 못했다. 국가 자체가 엉망진창인데, 그 일 중 대표적 사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그래서 꼭 올해 안에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하게 됐다.
 
   
▲ 강애심 배우가 '빨간시'의 한 장면을 선보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맡은 강애심 배우의 열연이 돋보였다.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가?
ㄴ 강애심 배우와 초연 때부터 함께해 왔다. 그래서 '빨간시'하면 강애심을 떠올리고, 강애심 배우 본인도 '빨간시'를 대표작이라고 한다. 강애심 배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배역이었다. 2011년 4월, 남산예술센터에서 내가 쓴 작품인 안경모 연출의 '살'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빨간시'를 그때 한참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강애심 배우가 할머니 역할을 하면 참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프로덕션 들어갈 때, 5월~6월 중에 연락을 드릴 것 같다. 제작비가 전혀 없어서, 개인 제작비로 참여한다. 그래서 스태프도 다 노 개런티로 출연한다. 해주시겠습니까?"라고 여쭤봤다. 대본을 읽어보신 후, 흔쾌히 같이하겠다고 해서 참여해주셨다.
 
올해 초 영화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귀향'이 개봉되어 358만 관객이 관람했다. 이 작품에서 할머니들이 겪었던 고초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표현 방법에서 아쉬웠다는 평이 있었다. '빨간시'에선 그러한 장면을 할머니의 독백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ㄴ 그 부분의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고통 표현을 해야 할 지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이 이러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이 고통에 공감하고, 할머니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심어줄 수 있는 점이었다. 관객들이 도망가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미장센을 통한 예술 완성도보다 많은 사람이 보고 거부하지 않은 정도의 수위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게 뭘까 했다. 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진실과 멀어질 수도 있고, 적나라하게 표현될 것 같았고, 이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 강애심 배우가 '빨간시'에서 독백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그래서 희곡의 본체가 말이니, 말의 힘을 빌려,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15분 독백을 쭉 하는데, 그 장면을 담담하게 사람들 스스로가 상황을 추상해 볼 수 있게 할 것 같았다. 가감 없이, 감정의 압박 없이 담담하게 15분을 쭉 밀고 갔다. 그 부분은 내 선택이 유효했다고 본다.
 
정말로 많은 관객이 그 부분에서 눈물을 흘렸다.
ㄴ 처음 대본이 나왔을 때, 모든 사람이 독백을 잘라내자고 했다. '지겹고, 지루해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심지어 강애심 배우도 자르자고 했다. 이 15분 동안 관객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볼 것이라고 말한 내 주장이 결국은 옳았다.

작품에 출연하는 기자 이름은 '동주'다. 윤동주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데, 어떤 이유로 캐릭터 작명을 하게 됐나?
ㄴ 당연히 윤동주를 떠올리면서 작명을 했다. 윤동주를 되게 좋아한다. 시인으로 그분의 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분의 삶도 좋아한다. 거창하게 독립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식민지하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정체성을 고민하고, 좀 더 큰 액션을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여기며, 여생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기자가 그런 내면 상태에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동주'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문학에 대한 꿈을 접고 기자를 하게 됐다. 보이는 그대로를 쓰지 못하고 권력에 의해 자신이 쓰는 글을 못 쓰는 상황이라 좌절감이 컸을 거라 생각한다. 식민지하에서 자괴감과 패배감을 이 친구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이해성 작가 본인의 마음 역시 작품 속 '동주'의 마음과 비슷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ㄴ 스스로 그런 고민과 갈등을 많이 했다. 집단 지성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하거나 이것에 대해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성이라고 하기엔 약간 모호하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나는 다 '동주'에 해당한다고 본다. 모르는 것도 죄라고 하면 죄일 수 있겠지만, 알고도 행동하지 못한다면 큰 잘못이라 생각해 출발한 작품이다. 사회 구성원이 정말 거대한 침묵에 휩싸이고 있고,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촛불 집회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을 것 같다.
ㄴ 민중이라는 시민 집단이 근본적으로 선의와 정의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표출되어 나오는 임계점이 있는 것 같다. 먹고 살기도 바쁘고, 개인적인 일이 많아서 참고 견디는 이들도 많다. 모든 사안에 하나하나 이야기하거나, 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폭력과 불의의 수위가 일정 부분 차오르면 그러한 민중의 힘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광우병 촛불 실패 이후, 많은 냉소주의가 흘러나왔다. 해봐야 안 된다는 것이 팽배해졌고, 여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가 시민들 내에 있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 많은 분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0월, 극단 고래는 광진문화재단 상주예술단체로 들어온 첫 공연을 '고래햄릿'으로 정했다. 첫 각색 작품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
ㄴ 보통 내 작품 쓰면서 공연을 하고 싶은 창작의 욕구가 있다. 아직도 꺼내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중 포함되는 것이 셰익스피어 명작들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작품을 보면서 아쉽다, 이런 해석이 좋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 욕구를 꺼내게 됐다. '햄릿'을 보면서 우리 이야기처럼 딱 와 닿지 않았다. 정서 같은 게 착착 감겼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은 허황한 느낌으로 왔다. 한 번 해봐야겠다고 했는데, '권리장전 2016-검열각하' 프로젝트와 매치가 되면서 시작하게 됐다.
 
   
▲ 연극 '고래햄릿'의 한 장면.
 
'햄릿'의 어떤 부분이 와 닿지 않았었는가?
ㄴ '햄릿'의 어머니인 '거트루드'와 연인인 '오필리어'의 모습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여성 캐릭터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왜 이런 판단을 했을까? 동시대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여서 '워싱'을 했다. 우리 시대에 맞지 않는 장황한 대사도 거르고, 상황을 바꾸기 시작했다. 특별한 의도로 방향을 바꾼 게 아니었고, 상황에 맞게 동시대에 사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먼저 이해가 되어야 했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극단 고래를 만든 지 5년이 됐다. 5년이라는 시간을 회상해본다면?
ㄴ 5년이면 되게 길게 느껴지는데, 창단공연을 한 것이 5년밖에 안됐느냐는 느낌도 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어려움과 즐거움이 공존했다고 본다. 오랜 기간 극단을 운영하시는 분은 아실 것이다. 극단 운영이 열악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이해를 시켜야 한다. 그게 지난한 작업이었고, 어려움 있을 것이라 본다. 극단을 만든 지 5년이 지나면서 보람이 있다.
 
우리 극단의 작품을 보고 움직인 사람이 꽤 있다는 생각을 했다. '빨간시'를 보고 수요집회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과 '빨간시'를 보고 극단 고래에 지원했다는 사람도 많았다. 여기에 '사라지다' 작품을 보고 어떤 영향을 받은 사람의 피드백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
 
또한, 극단원의 변화도 보람을 느낀다. 1기는 5년 차, 2기는 4년 차로 활동하는 건데, 연습할 때마다 우리는 108배를 매일 꼬박한다. 연습을 할 때마다 하다 보니 나처럼 생활화됐다. 단원들의 변화가 크게 느껴진다. 다 같이 깊이가 생겼고, 많이 성숙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앞서 말했지만, 극단 고래는 연습 전에 '108배'를 한다. 왜 하는가? (프레스콜 당시 질문 中)
ㄴ 그래서 '108 고래'라고 하는데. 명상하는 것으로, 내가 가진 연극 메소드 중 하나다. 종교적 의미는 하나도 없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적당한 텐션을 가장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연극 메소드다. 정말 좋다.
 
   
▲ '고래햄릿'에 나오는 극중극 춤 장면.
 
극단 고래의 작품인 '고래햄릿'과 '빨간시'를 보면, 중간에 노래와 춤이 등장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ㄴ 내가 노는 것을 좋아하고, 흥도 있어서, 지루한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식구가 많다 보니, 가능하면 무대에 많이 세우고 싶은 욕심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맨날 욕한다. "이래서 극단 운영 어떻게 하냐. 2인극, 3인극, 4인극을 하라"고 한다. 무대에 사람들을 많이 세우고 싶어 방법을 찾다가 코러스를 배치하게 됐다. 코러스를 넣다 보니, 춤과 노래가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중간에 살풀이 내지 씻김굿 같은 개념의 논의를 꼭 넣게 됐다. 사람들에게 어떠한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살풀이 시간을 의도적으로 넣으면서 정화를 하고자 했다.

'고래햄릿'을 보면 극장의 공공성과 예술 표현의 자유가 부딪치는 장면이 나왔다. 검열의 사회적 합의 기준선은 어떻게 보는가? (프레스콜 당시 질문 中)
ㄴ 우리가 검열 사태를 거치면서, 언어 선택이 많이 왜곡된다. 이것은 공공성과 예술성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개념 인식의 차이다. 공공성의 규정을 통해 '일부가 싫어하니 예술을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면, 정말 잘못된 개념이다. 예술은 소수든 다수든, 어떤 사람의 주장이든 간에 논란을 만들어 그 사회적 논란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합의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 논란을 막는 것이 이 사회를 망치는 것이다.
 
국가가 규정한 공공성을 통해 "맞냐 아니냐"가 아니다. 공공성은 관객들이 판단하는 것이다. 국민은 어떤 예술이라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 판단은 시민인 관객을 하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해온 것들이다. '이 작품은 포르노다. 문학적이다. 정치적이다'하는 모든 것을 국민이 하는 것이다. 정부가 하니까 하지 말라는 것은 틀려먹은 것이다. 예술에 대한 개념이 틀린 것이다. 
 
   
 
일명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에 떠오른 지 이제 두 달이 되어가고 있다. 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한마디로 창피하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가 서구에 비해 짧긴 한데, '6.29' 이후 현재까지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검열 세대가 아니다. 연극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검열이 없었다. 체감적으로 검열은 와 닿지 않는 단어였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직접 연극계에서 '펑펑' 내려치기 시작해 당황했다. 이게 과연 사실일까? 처음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사실이라는 것이 나오면서 오는 감정은 분노였다. 다음엔 투쟁을 시작했다.
 
이런 것이 있다. 지원금 사업을 통한 분열이 연극계 내부에서 일어나게 된다. 지원금을 받은 팀·단체와 받지 못한 팀·단체의 스펙트럼이 나뉘게 된다.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상처를 주기 시작하고, 냉소에 빠지고, 행동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9일)이 국가적으로 역사적인 날인데, 그런 상황에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적폐들을 일시에 좀 더 털어낼 기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처음 말씀드린 대로 세계적으로 보면 창피하기도 하다. 이런 대통령을 뽑은 게 국민으로 창피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희곡 작가를 포함한 많은 연극인이 '세월호 사건'의 이전과 이후를 놓고 변화했다고 말했다. 
ㄴ 나 역시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리본으로 고정해 놓은 상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까지 바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이 팔찌를 차고 다니는 이유는 당장 세월호에 대한 작품을 직접 쓰지 않더라도, 끝날 때까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떤 작품을 쓰더라도 세월호가 깔리게 된다. '고래햄릿'에도 들어가고, '빨간시'에도 덧붙였다. 다음 작품을 쓰더라도 들어갈 것이다.
 
세월호 사건은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전과 이후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어떤 정의나 고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아픔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전 국민이 트라우마가 있고,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그러한 영향이 스며들 것이라 본다.
 
   
▲ 광화문광장 텐트촌에 있는 '연극인 텐트'의 1대 방장인 방혜영 연출(왼쪽)과 2대 방장인 이해성 연출(오른쪽).
 
현재 광화문광장 텐트촌에서 '연극인 텐트'의 '2대 방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감을 들려 달라.
ㄴ 방혜영 연출님이 초대 방장으로 있었고, 나는 여기에 3일째 머물러서 딱히 할 말은 없다. (웃음) 연극을 하면서 이런 일들이 터져 같이 분노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사실 대부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본다. 상징적인 한 공간을 점유하고, 농성할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연극인들에게 저항의 몸짓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굳이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없애버리자'라고 하지만, 문화예술인이 텐트촌을 만들어 구성하고 생활하는데, 연극인들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국민에게도 이 텐트가 검열의 저항 구심점 역할을 해준다고 믿는다. 거창한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산에서 '비박'을 한다는 마음으로 이 텐트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초대 방장님이 열심히 해주셔서 '꽁'으로 무혈입성한 느낌이다. 다 갖춰져서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막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ㄴ 한편으로는 당연한 국민의 요구이니까, 국민의 요구를 관철한 것 같아 기쁘다. 가결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한다. 헌법재판소가 심리 기간을 끌 것 같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가결할지 부결할지 알 수 없는 상태이고, 저쪽에서 어떤 공작을 해올지 몰라서 불안하기도 하다. 헌법재판소에 대해 국민이 촛불을 통해 압박해야 한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보는데, 지금부터 국민이 정신 똑바로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빨간시'에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장면이 풍자 형태로 나루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이다. 이후 21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다시 공연이 열리는데, 이번 탄핵안 가결이 수정되어 들어갈 수 있을까?
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 같은 경우는 약간의 터치가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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